범LG가부터 청와대까지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발걸음…슬픔 한 마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구본무 LG 회장 빈소. 구 회장의 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오른쪽)가 빈소를 지키고 있다. <LG 제공>

[한국정책신문=나원재 기자]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20일 타계한 가운데, 정·재계 인사의 조문이 이어졌다. 그룹은 이날 장례는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르기를 원했던 구 회장의 유지와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 외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지만, 고인의 마지막을 애도하는 발걸음은 저녁 늦게까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날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조문객은 GS그룹, LS그룹 등 범LG가 총수들이었다. 오후 5시까지 구자극 엑사이엔씨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이 빈소를 찾았고,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 구본완 LB휴넷 대표, 구본천 LB인베스트먼트 사장, 구자용 LS네트웍스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조문했다.

이어 오후 6시까진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구자학 아워홈 회장, 구본걸 LF 회장, 구자철 예스코홀딩스 회장과 변규칠 전 LG상사 회장, 이문호 전 LG 부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빈소를 찾았고, 오후 8시까진 신희철 서울대 의대 박사, 이헌재 전 부총리, 김성태 의원, 하태경 의원, 구자열 LS그룹 회장, 허윤홍 GS건설 전무가 애도하기 위해 발걸음을 했다.

오후 10시까진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 구본혁 LS니꼬동제련 부사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허세홍 GS글로벌 사장, 이상철 전 LG유플러스 부회장, 남용 전 LG전자 부회장이 빈소를 찾았다.

구 회장은 지난 1년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생전 유지에 따라 이날 숙환으로 타계했다. 재계와 정계는 고인의 뜻을 받들면서 큰 슬픔으로 애도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날 조문 후 기자들과 만나 “존경받는 재계의 훌륭한 큰 별이 떠나신 것에 대해 대통령께서도 안타까워하셨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대한민국 경제의 큰 별인 구 회장의 별세에 대해 경제계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구 회장이 계셔서 우리 경제는 번영과 영광을 누렸고, 꿈을 꿀 수 있었다”며 “우리 경제의 재도약 시기에 훌륭한 기업인을 잃은 것은 나라의 큰 아픔과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구 회장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구 회장의 정도경영에 따른 노경화합은 LG그룹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기업으로 발돋움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밝혔다.

경총은 이어 “경제계는 고인의 뜻을 이어 하루 빨리 산업 현장에 선진 노사 관계가 정착되고, 이를 통해 지속적인 국가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4남2년 중 장남, 23년간 글로벌 기업 성장주도

고인은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손자이자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1945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세대를 거쳐 미국 애슐랜드대학교를 졸업 이후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LG화학 심사 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1995년 경영권을 물려받고 회장직에 취임했고, 당시 매출 30조원의 LG그룹을 지난해 매출 160조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어왔다.

그는 지난 23년간 LG의 주력사업인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와 차세대 성장 사업인 자동차부품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차세대 디스플레이, 에너지, 바이오 등을 성장시켰다.

이런 그에 대해 재계는 “재벌 총수답지 않게 소탈하기 때문에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지만, 경영 활동에선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비즈니스맨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의 리더십은 곳곳에서 엿보였다.

1998년 구 회장은 대규모 장치산업인 디스플레이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그는 당시 외환위기 상황에서 정부 주도의 ‘빅딜’ 논의로 반도체 사업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미래 먹거리를 위해 LG전자와 LG반도체의 액정표시화면(LCD) 사업을 분리해 ‘LG LCD’ 설립을 결정, 발표했다. 이후 LG는 디스플레이 세계 시장서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2차전지 사업도 구 회장의 리더십이 묻어난 사업이다. 그는 1992년 영국 출장에서 2차전지를 보고 미래 사업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룹은 연구개발(R&D)과 투자 등을 하면서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구 회장은 조직을 독려하며 사업을 주도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LG화학은 중대형 2차전지 부문 세계 최고 경쟁력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LG화학은 현재 세계 30여곳의 완성차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이동통신사업 또한 구 회장 취임 직후부터 시작해 성장한 사업이다. 그룹은 2000년 유선사업 인수로 통신사업을 강화하면서 2010년 LG텔레콤, LG데이코, LG파워콤 등 통신 3개사를 합병해 LG유플러스를 출범시켰다.

LG유플러스는 출범 초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구 회장은 “4세대(G) 롱텀에볼루션(LTE)를 대비해 네트워크에 과감히 투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LG유플러스는 현재 시장 점유율을 20%대까지 끌어올리면서 경쟁력을 제고하고 있다.

◆소탈하지만, 기업문화까지 직접 챙긴 승부사

현재 LG의 심벌마크인 ‘미래의 얼굴’을 최종 결정한 것도 구 회장이다. 그만큼 후 회장은 사업 포트폴리오 못지않게 기업문화를 신경써왔다. 그룹에 따르면 구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CI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에선 ‘럭키금성’은 이미 브랜드 파워가 대단했기 때문에 반대가 심했지만, 구 회장은 이를 끈기 있게 추진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국내 대기업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 전활을 결정하기도 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외환위기 때 문어발식 순환출자와 사업 확장의 덫에 걸려 어려움을 겪었지만, LG는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2003년 3월 지주회사와 자회사의 수직적 출자구조로 바꾸면서 조직의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그의 리더십은 지병으로 경영 일선에서 사실상 물러나기 직전까지도 미래 성장동력 사업 육성에 묻어났다. 구 회장은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 성장사업 기반을 마련했고, 그룹은 현재 서울 마곡에 위치한 R&D 집결체인 LG사이언스파크를 조성해 미래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그룹의 전장(전자장비) 등 자동차 부품도 LG 주요 계열사들의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성장했다.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세계 1위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등은 차세대 자동차 산업을 위한 각종 부품과 솔루션 개발사업을 육성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동반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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