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희=미디어미래연구소 부실장] 제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면서 각 분야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의제로 대두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이 무엇이냐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치열하지만,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 중 하나는 영역 간 경계를 허무는 융합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융합(convergence)’이라는 용어는 지난 20여년간 미디어 산업에서 핵심적인 키워드였다.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은 다른 어느 영역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그만큼 융합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를 겪어 왔다. 문제는 시장의 변화에 정책적으로 적절하게 대응해 왔느냐 하는 것이다. 매체 별 성격에 따라 규제 수준은 다르지만 미디어는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다른 영역보다 규제 수준이 높은 편이다. 그런 만큼 시대적 변화에 대응한 규제 체계 개선이 필요하다.

미디어와 관련해 지난 10여년 간 융합과 창조경제라는 키워드 아래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차치해 두고라도 융합 환경에 대응해 충분히 적절한 대응을 해 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2008년 방송통신 융합에 대응해 융합기구 방송통신위원회가 출범했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방송의 경우 방송법과 IPTV법 두 개의 법을 일원화하지 못하고 있다. IP 환경이 고도화되고 방송의 전송기술이 발전하면서 방송서비스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지만 현재의 법적 정의나 규정으로는 새로운 서비스를 유연하게 포섭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의 경우 1992년 유료방송 플랫폼 사업자의 허가체계를 통합해 MVPD(multichannel video programming distributor) 사업자로 규정하였다. 유럽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융합환경에 대응해 사업자 분류체계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영국에서는 2003년에 융합법(communication act)을 만들어 적용해 오고 있다. 또, 영국에서는 매체에 따른 수직적인 사업자 분류가 아니라 미디어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기준으로 수평적인 사업자 분류 체계를 마련해 이를 기준으로 방송을 구분하고 있다. 국내서는 여전히 새로운 방송사업자가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방송 정의를 추가해야 하는 실정이다.

미디어 환경변화에 대응한 규제 체계 미흡으로 사업자들은 규제 불확실성에 처해 했고, 신규 미디어의 경우 유연한 진흥정책 및 지원 정책 추진이 어려울 뿐 아니라 규제 공백이 존재하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방송통신 산업의 사회적 가치와 산업적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청사진이 필요하다. 미래지향적 청사진에 입각하여 산업을 합리적으로 분류하고 규제와 진흥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일은 어렵다. 기존의 법체계를 구조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일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단기간에 대대적으로 구조를 개편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일어났던 미디어 시장의 변화와 제4차 산업혁명 등 미래의 변화를 고려할 때 방송통신 산업의 분류를 합리적으로 새로이 하고 이에 맞는 진흥과 규제 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분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와 같은 신규미디어 서비스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데이터 기반 경쟁과 같은 새로운 경쟁 양상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지 등 새로운 이슈에 대한 대응은 더욱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각각의 매체 특성에 맞는 정의와 정책 마련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공적인 영역에 있는 사업자에게는 그에 적합한 공적 책무를 부여해야 하고 허가체계를 포괄적으로 통합하더라도 각 매체의 성격에 맞는 정의와 정책을 마련해 각 매체가 가진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도록 매체의 역할을 정립해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시장에는 늘 현안 이슈가 많다. 다급한 일들도 많지만 지난 수년간 지적돼 왔던 해묵은 숙제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미래지향적 정책방향을 설정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보인다. 제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하는 등 여러 가지 규제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미디어 분야에서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에 필요한 진흥과 규제도 필요하지만 기존 규제 체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준비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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