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뒤집어 보기]재판부마다 '신의칙' 오락가락 판단…전산업에 경영애로 가중시켜

[한국정책신문=최형훈 기자] 기아차 통상임금 1심 선고 이후 법원의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신의칙)에 대한 판단이 오락가락하고 있어 전 산업계에 심대한 경영애로를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번 소송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생긴다며 '신의칙'에 따라 노조 측 주장을 인정해선 안 된다는 사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에 심각한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닌 정도의 추가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이처럼 원칙적으로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는 사례가 다른 업종, 업체에도 적용되는 경우 전 산업계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 산업계에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특히 통상임금을 둘러싼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어 업종·업체별 분쟁은 더욱 뜨거워 질 것으로 우려된다. 

실제로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 인정 여부를 놓고 재판부마다 오락가락하며 다른 판단을 내려왔다. 심지어 같은 소송임에도 1심과 2심이 엇갈리는 판결을 내리는 것도 다반사여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 재계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법원이 신의칙을 놓고 저마다 다른 판결이 나오는 것은 뚜렷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신의칙 인정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법리적·사회적 합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법 제2조 제1항이 규정하는 신의칙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통상임금의 범위가 넓어져 회사가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하는 상황, 회사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이 우려된다면 근로자들이 청구한 과거 소급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형태로 적용되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매달 지급하는 기본급과 고정성 수당을 통상임금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다 1996년 삼척군 의료보험조합 판결 이후 법원 판례에 따라 변경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법원은 '모든 임금은 노동의 대가'라며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할 가능성을 열었다.

이때 법원은 '지급주기 1개월'로 해석되던 정기성 요건을 깼다. 지급주기가 1개월을 넘어도 일정기준을 만족하는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지급되고, 업적, 근무시간 등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고정적으로 지급되면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의료보험조합 소송 때 정기상여금은 근무일수라는 지급조건이 있다는 이유로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 시내버스 회사인 금아리무진 소송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대법원은 이 회사 정기상여금에 대해 지급조건에 제한이 없어 고정성까지 있다고 봤다.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첫 판결이었다. 이 판결 이후 전국적으로 유사한 소송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이후 대부분의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신의칙 적용 여부가 쟁점이 됐고 통상임금에 정기상여금을 포함하더라도 신의칙이 적용될 경우 회사측은 과거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소송마다 뚜렷한 기준이 없어 판결이 엇갈려 온 것이다.

삼성중공업과 현대위아, 현대비앤지스틸, 현대다이모스 등은 1심에서 신의칙을 인정받지 못한 채로, 만도는 1심에서 신의칙을 인정받은 채로 항소심 변론을 진행 중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1심에서는 회사가 패소했지만, 항소심에서는 신의칙이 적용됐다. 아시아나항공, 현대미포조선 등의 통상임금 소송 사건 또한 1심과 2심의 신의칙 판단이 엇갈린 채로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가장 최근에 '신의칙'을 인정한 사례는 금호타이어 통상임금 소송이다. 광주고법은 지난 18일 금호타이어 노조원 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들 노조원은 통상임금에 상여금을 반영해 3800여만원을 추가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재판부는 노조원의 청구를 기각하며 "근로자가 노사 합의한 임금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예상외의 이익을 추구해 사용자에게 예측하지 못한 재정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이는 종국적으로 근로자 측에도 피해가 미치게 돼 노사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근로자 측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는 신의칙에 위배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금호타이어의 2016년 6월 기준 부채가 4조원에 달해 자본총액 대비 147%에 이른 점, 워크아웃 종료 이후 당기순손실이 급증하는 등 경영 사정이 악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는 ‘신의칙’에 관한 한 ‘복불복’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며, 옳고 그름을 떠나 구체적인 명시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단체들도 통상임금의 명확한 범위와 규정 등은 물론, 신의칙의 세부지침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31일 판결 후 "오늘 판결은 기존의 노사 간 약속을 뒤집은 노조 주장은 받아들이면서 지난 수십 년간 이어온 노사 합의를 신뢰하고 준수한 기업에 일방적으로 부담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이라며 "허탈감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경총은 이어 "대법원에 통상임금 신의칙과 관련한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만큼, 대법원이 신의칙에 대한 예측 가능한 합리적 판단 기준을 신속히 제시해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중소기업계도 나섰다. 중소기업중앙회도 이날 성명을 내고 "법원의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판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며 "내년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건비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정기상여금 등 통상임금 범위 확대로 기업은 이중부담을 지게 됐다"고 밝혔다. 

중기중앙회는 이어 “통상임금에 대한 명확한 입법화와 상여금, 식대 등이 포함되지 않는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통상임금에 맞춰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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