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자동차산업, 기아차 패소하면 "한국서 짐 싸야할 판"

[한국정책신문=나원재 기자] 오는 17일은 의미있는 날이다. 임기 5년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날은 지난 2011년부터 이어져온 기아자동차의 통상임금 관련 소송의 1심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법원의 판단은 한국 산업의 명운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산업계는 숨 죽인 채 이날을 예의 주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산업에 미칠 파장의 크기를 의식한 듯 현대·기아·한국지엠·르노삼성·쌍용 등 국내 완성차 5개사 모임인 한국자동차산업협회를 비롯해 자동차 관련 단체들이 앞다퉈 성명서를 내놓고 법조계는 물론 정치권과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지난 10일 채택한 성명서에서 “기아자동차가 통상임금에 상여금을 포함시켜 달라는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국내 자동차산업 전체의 경쟁력 위기가 가속화 될 것이며,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는 방안까지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협회는 이어 "합법적으로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결정된 과거 및 현행 임금체계, 임금총액은 그대로 인정돼야 하고, 통상임금에 관한 새로운 판결내용은 기업의 건전한 임금 지불능력을 고려한 새로운 임금체계에 대해 노사합의가 이뤄질 때부터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9일에는 270여 개 자동차부품 업체들로 구성된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과 한국자동차산업학회, 자동차부품산업진흥재단은 공동명의로 '3중고에 휘둘리는 위기의 자동차부품산업계 호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서 이들 단체들은 “자동차부품 업계와 관련 학계가 판매 부진, 통상임금 소송, 노사 갈등 등으로 국내 자동차 산업이 큰 위기에 처했다”며 정부, 국회, 법원에 도움을 요청했다.

호소문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자동차 생산은 2015년보다 되레 7.2%나 줄어들고 인도에 밀려 세계 6위로 내려앉았다. 10년 넘게 독일, 일본에 이어 3위를 지켰던 수출도 올해 들어 멕시코에 3위 자리를 내줬다.

올 상반기 국산차 수출량(132만1390대)은 2009년(93만8837대) 이후 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저 앉았다. 중국 시장 판매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둘러싼 중국의 보복 여파로 1년 전보다 40% 이상 급감했다. 같은 기간 내수 판매도 4% 줄었다.

이들 단체들은 완성차 매출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품을 생산·납품하는 중소 협력업체들로서 이들 역시 매출이 감소하고, 가동률이 떨어지는 등 경영난을 겪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이번 사건의 발단은 기아차 노조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통상임금은 노동자에게 정기적, 일률적으로 소정 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해 지급하기로 정한 시간급, 일급, 주급, 월급, 또는 도급 금액을 말한다.

통상임금은 연장근무 등 각종 가산수당 등에 대한 산정 기준이 된다. 노조가 승소하면 기아차는 밀린 3년 간의 통상임금 및 수당 등 인건비 소급분과 지연 이자까지 약 3조1000억원을 노동자에게 줘야 한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기아차 노조와 사측의 주장은 이렇다. 노조는 상여금 등이 포함된 새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과거 3년(임금채권 기한)간 받지 못한 각종 통상임금 연동 수당을 계산해 지급하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측은 지금까지 해마다 임금협상에서 노사합의에 따라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았던 만큼 '신의성실 원칙(이하 신의칙)'에 따라 과거 분까지 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과거 유사한 대법원 판례는 있다. 지난 2013년 대법원은 과거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해 임금 수준 등을 결정했다면, 이후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더라도 이전 임금을 새로 계산해 소급 요구하지 못한다는 취지로 판결한 바 있다. 다만 소급 지급 시 경영 타격 가능성 등을 조건으로 달았다.

◆파급영향 얼마나…전산업 추가 부담 규모 30조원 상회

노조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기아차가 토해내야 할 3조1000억원은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 7868억원의 4배와 맞먹는 액수다. 기아차의 대주주인 현대차도 최대 1조원 가량 순익이 감소하게 된다. 두 회사의 수익이 악화되면 5300여 협력사도 납품단가 하락, 매출 감소, 일자리 위축 등 후폭풍을 피할 수 없다.  

3조원의 비용을 3분기에 한꺼번에 반영하면 2조6000억원에 이르는 영업손실이 불가피하다. 기아차 지분을 33.88% 가진 현대차도 지분법에 따라 이 적자를 지분 비율만큼 떠안게 된다. 통상임금 판결이 현대차그룹의 '도미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통상임금의 파장이 자동차산업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재 노조와 통상임금 관련 소송 건수는 종업원 450명 이상 이상 35개 기업, 103건에 이른다. 이중 관련 소송전을 벌이는 아시아나항공과 교보생명, 대우여객, 한국지엠, 현대중공업 등 대기업은 20여 개에 이르는데 이들이 모두 패할 경우 이들이 부담할 비용은 최대 약 8조원(한국경제연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현재 노조와 통상임금 관련 소송을 벌이는 기업 전반으로 추산하면 재계 전체로는 최대 30조원의 노동비용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쟁점사항…‘신의칙’(신의성실 원칙)

통상임금 소송의 최대 쟁점으로는 '소급지급 관련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 인정 여부다. '신의칙'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 이행은 신의를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는 민법 제2조 1항을 말한다.

재판부는 회사가 근로자에 대한 임금지급으로 중대한 경영상의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하면 지난 2013년 대법원의 판단과 같이 ‘신의칙’ 원칙을 인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회사는 소송금액 전액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산업계에서는 기아차가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올 상반기 실적이 지난해 대비 55% 줄어들고 미국 시장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점 등을 들어 신의 성실의 원칙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최종변론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기아차의 대리인들이 '신의칙‘에 따라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 같은 맥락에서다.

당시 기아차의 대리인은 "기아차의 통상임금이 현재 악화한 상태"라며 "상여금이 통상임금이 맞더라도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차단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최근 노사 간에 통상임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서 추가로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며 "이러한 부분도 판단하는 데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었다.

재계 관계자는 "2013년 대법원 판결에서 신의칙을 제시했음에도 이후 개별기업의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는 재판부의 성향에 따라 신의칙이 인정되기도, 부정되기도 했다"며 "만약 이번 기아차 판결에서 신의칙이 배제되는 경우 전 사업에 미칠 파장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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