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 영향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헌정사상 두 번째로 모든 공은 헌법재판소를 넘겨졌다.

그동안 칼바람이 부는 추위에도 수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밝힌 것이 주효했다.

대한민국의 첫 여성대통령, 부녀대통령 등의 수식어를 달고 해외에서도 주목했던 박 대통령이 "어려웠을 때 도움을 줬던 사사로운 사람" 때문에 역사에 불명예로 기록될 대통령이 된 것이다.

AP통신 로이터 등 세계 주요 외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보수층 유권자들이 박 대통령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수십 년 전 이룩한 경제성장을 그리워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외신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부패한 인물인 '최순실'에게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사실상 넘겨주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곤두박질쳤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기 전까지 박근혜 정권의 4년을 보면 북한과의 대치, 세월호 참사, 언론의 자유와 노동권 억압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외신은 분석하고 있다. 

각 팩트별로 외신들이 전한 내용을 살펴보자.

2013년 2월 25일 제18대 한국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로 향하며 시민들에게 손을 박근혜 대통령. <출처=청와대 홈페이지>

◆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서 대한민국의 첫 여성대통령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억압하고 투옥했으며 자유를 짓밟은 무자비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경제를 일으킨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집권하는 동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배 높아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머니의 사망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가 암살된 뒤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외환 위기가 불어닥치자 과거의 빠른 경제 성장을 그리워하던 1990년대 말 박근혜는 오랜 잠적을 청산하고 정치에 입문한다.

국회의원 박근혜는 정치입문 이후 한국 보수의 아이콘이 됐고, 선거에서 잇따라 당시 한나라당의 선전을 이끌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를 바타응로 2013년 2월, 박근혜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한국 헌정사상 처음 여성으로서 어렸을 때 소중한 기억을 간직했을 살았던 청와대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 2월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되고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으로 돌입한 12일 오전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출처=포커스뉴스>

◆ 핵무기를 든 북한과의 대치…'통일은 대박'이라는 말로 로드맵 제시

박 대통령의 5년 임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다. 유엔이 대북 제재를 한층 강화하자 북한은 서울과 워싱턴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박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대북 지원을 하겠다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통일이 가져올 경제적인 혜택을 언급하기도 했다. 나아가 정부와 사회가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한발 앞선 말로 이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런 대북정책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북한은 미국의 체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올해만 두 차례 더 핵실험을 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을 향해서는 원색적인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마침내 강경 노선으로 선회했다. 역대 정권이 어렵게 성사시킨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남북한 경제 협력의 마지막 상징까지 일순간에 파괴한 것이다.  

<출처=유튜브>

◆ 박근혜 대통령의 치명타가 된 '세월호 참사'…'7시간의 미스터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 넘는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박 정권에 지울 수 없는 치명타를 던졌다.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대형 참사로 기록될 세월호 참사에 전 국민이 애도를 표했고, 공공안전은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무능하게 대처해 박근혜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더욱 신속하게 대응하고 체계적으로 구조 작업을 지시했다면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비판이 현재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행적이 가장 큰 이슈다. 박 대통령은 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은 지 '7시간'이 지난 뒤에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승객이 여전히 배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초를 다투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7시간이 지난 뒤 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은 박 대통령은 "구명조끼를 입은 학생들을 왜 발견하는 게 어렵냐"고 묻는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구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국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청와대는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전화와 서면 보고로 시시각각 상황을 보고받았고 구조를 지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대통령이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는 여론이 매우 높다. 몇몇 국회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미용 시술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정 역사교과서. <출처=포커스뉴스>

◆ 외신기자 명예훼손 등 표현의 자유 후퇴…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박 대통령은 의사 결정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아버지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통치 스타일을 드러내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한국 검찰은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명예훼손으로 기소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일곱 시간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에서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해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박근혜 정권의 언론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또한 박 정권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추진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박정희의 독재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출처=포커스뉴스/DB>

◆ 정경유착에도 살아나지 않은 경제와 '최순실 게이트'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겠다던 박 대통령은 아버지가 통치하던 시절의 경제 성장을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가계 부채와 청년실업률은 계속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동안 정경유착으로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재벌들도 경제 위기를 피하지 못하고 국가 경제를 반전시킬 만한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최순실 게이트'는 박 정권에 결정타가 됐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퍼스트레이디였던 시절부터 각별히 따랐던 것으로 알려진 고 최태민씨의 딸 최순실씨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국정을 농단한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여기에 수많은 이익을 취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박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최씨는 아무런 공식 직책도 맡지 않았음에도 각종 정부 정책과 인사에 개입하고 대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어내 착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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