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는 살인적인 대낮의 폭염과 열대야가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폭탄'이 두려워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 등으로 버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애써 장만한 에어컨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장식품이 되어가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누진제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나 정부는 신에너지 산업 투자재원 등을 운운하며 시민들의 불편은 아랑곳한 체 개편은 어렵다는 요지부동의 입장이다.

현행 누진제의 가장 큰 문제는 요금누진율이 전기사용량에 따라 너무나 가파르게 늘어난다는 데 있다. 6단계로 시행되고 있는 누진제의 최고구간 요금이 최저구간에 비해 무려 11.7배나 높다. 평소 전기요금이 4만4000원 수준인 가정이 여름철 한 달간 에어컨을 하루 3시간 가동한다면 약 9만8000원, 6시간 튼다면 18만원이 넘는 터무니없는 전기요금을 내야한다. '전기요금 폭탄'이라는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정부가 누진제를 개편하지 않는 이유는 저소득층 부담을 줄이고 고소득층의 전기사용을 억제하자는 것인데, 섣불리 개편하면 '부자감세' 효과만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10년째 유지해 온 불합리한 전기요금 체계를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는 데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애초 취지였던 소득재분배 효과는 점점 떨어지고 있고, 기후변화와 가전제품 보급 등 각종 여건이 변하면서 오히려 저소득층에만 절약을 강요하는 상황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가운데 최근 전기요금 누진제를 버티다 못한 일부 뿔난 시민들이 대거 집단피해소송에 나섰다. 지난 10년간 전력소비량이 300kWh를 초과하는 가구비중이 5.8%에서 28.7%로 늘어나는 등 전력사용 행태가 크게 달라졌는데 소비자들에게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는 것이 요지다. 이를 맡은 법무법인에 따르면 한전을 상대로 한 '전기요금 부당이득 반환청구' 소송에 참여한 누적인원이 24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한전은 올해 상반기 전기료 판매가 26조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7월 전기판매량도 지난해 같은 달보다 5%가량 늘어 상반기 전기판매량 증가율 1.7%를 가뿐히 넘어섰다. 현재의 누진제 체계에선 전력소비가 늘수록 한전이 추가수익을 거둘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런데 한전은 가정용전기 누진제에 따른 영업이익에 대해서는 사업상 비밀이라며 공개마저 거부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현행 누진구간을 대폭 줄이고, 누진율도 재조정하는 등 근본적인 요금체계 개편이 필요하다며 다양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누진제를 채택한 미국과 일본, 중국도 최저와 최고 구간의 누진 배율이 최대 2배 이상은 벌어지지 않는다. 유독 우리네 가정들에만 과도한 누진제를 적용해 반강제적인 전기절약을 요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정치권에서도 야권을 중심으로 전기요금 체계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다. 국민의당은 누진단계를 6단계에서 4단계로 줄여 가계부담을 덜어주고, 대신 전기를 많이 쓰는 기업들에 요금을 더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최근 누진단계를 3단계로 줄이고, 누진배율을 2배 이내로 적용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정부는 폭염보다 시민들을 더 열 받게 하는 전기요금 체계를 바꿀 때가 됐다. 전기요금이 물가와 가계경제, 신재생 에너지사업 등 여러 분야에 얽혀 있어 쉽게 개편할 수 없다는 주장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누진제를 유지하더라도 가구당 전력소비가 늘어난 현실에 맞춰 누진구간 및 누진 배율의 조정이 필요하다. 민생을 돌보는 차원에서라도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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