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협력 '공조'로 이겨내야

[한국정책신문=최인철 기자]세계의 원조 팬데믹은 '흑사병'이다. 1348년 흑사병이 유럽에 번지면서 수년사이에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다. 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인들이 대참사의 원흉으로 선택한 것이 '반유대주의'다. 공교롭게도 페스트 초기 유대인 공동체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아 괘심죄로 페스트의 대유행을 주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비난은 혐오로, 혐오는 살육으로 이어졌다. 현재 독일 지역에 집중돼 있던 수백 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표적이 됐다. 유대인을 화형에 처한 이 광기는 유대인에게 마저 페스트가 전염되기 시작하자 멈춘다.

15세기 세계에 매독이 만연하자 다시 혐오의 씨앗이 되살아났다. 페스트와 달리 매독은 전염병이라 보기 힘들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모든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독일인들은 프랑스매춘부 때문이라면서 매독을 '프랑스병'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인 탓을 했고 폴란드인은 러시아인 탓, 페르시아인은 터키인 탓, 이슬람교도는 힌두교도 탓, 일본인은 포르투갈인 탓으로 돌렸다.
이민자가 급증하던 19세기 미국도 똑같았다.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콜레라가 대유행하자 혐오의 표적이 됐다. 카톨릭을 증오하던 미국의 개신교 엘리트들은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을 지목했고 콜레라를 '아일랜드병'으로 부르며 몰아세웠다. 콜레라의 원인이 오염된 우물로 밝혀지고 나서야 혐오가 사그러졌다. 1916년 뉴욕에서 소아마비가 창궐하자 엉뚱하게 이탈리아인 이민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득세하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약 2년간 세계를 휩쓸면서 5억명을 감염시키고 최대 4500만명이 사망케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 독감의 시작은 스페인과 전혀 상관이 없다. 미국의 군부대에서 발생한 독감이 세계에 번졌다. 전염 속도가 느렸던 것은 당시 주요 이동경로가 선박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감기라고 불려진 이유도 1차대전 당시 스페인이 유럽에서 몇 안 되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전시 보도관제 밖에 있었기 때문에 신형 바이러스의 감염과 참상이 자유로운 스페인에서 세계에 알려졌다. 물론 스페인에서 800만명이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고 국왕 알폰소 13세와 정부 관계자도 감염되는 등 피해가 가장 심각하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은 일제시대 한반도에도 밀어닥쳤다. 1918년 일제가 통치하던 대만을 순회한 일본인이 감염되고 전역으로 번졌다. 스페인 독감으로 일본 국내의 총인구 약 5600만명 중 0.8%이상에 해당하는 45만명이 사망했다. 조선은 23만명, 대만은 5만명으로 인구의 1.3~4%가 사망했다.

극심한 피해를 일으키는 전염병으로 인해 '공중 위생'개념이 생겨났다. 상하수도 등을 정비해 오물을 제거하고 병을 예방하고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 물류와 인류의 이동이 급증하자 검역 강화가 필요했고 1892년 최초의 국제 위생 규칙(ISR)이 만들어졌다. 이 규칙은 개정을 거듭해 각국 정부가 감염 확대 저지를 약속하는 국제보건규칙(IHR)으로 발전한다. 안전한 물 공급, 위생설비, 쓰레기수거, 하수처리, 환기 등 공중위생프로그램이 실시됐고 WHO(세계 보건 기구) 설립으로 이어졌다.

세계적 전염병 확산 여부는 국제적 '공조'에 좌우된다. 코로나19도 예외는 아니다. 혐오보다는 '공조'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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