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타계, 향년 83세

사진=대우세계경연연구회 홈페이지

[한국정책신문=최인철 기자]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장례는 가족장,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으로 한국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선도한 국제적 경영인이었다. 19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이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해체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1936년 12월19일 대구에서 아버지 김용하와 어머니 전인향씨 슬하 5남 1녀 중 4남으로 출생한 김 전 회장은 한국전쟁중 부친이 납북되면서 홀어머니와 함께 가족의 생계를 돌보면서 고학으로 경기고, 연세대학교 상경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31세 때인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하고 1969년 한국 기업 중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지사를 설립했고 1975년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1976년 한국기계,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등의 부실기업을 인수, 단기간 내 경영정상화를 이뤄내면 '신화'를 만들었다.

1978년 대우실업은 국내 기업 중 수출 1위를 달성하며 신흥재벌로 주목받았다. 1982년 주식회사 ㈜대우를 설립하며 재계 4위에 오르고 1983년 대우자동차 출범,  1984년 대우경제연구소 설립, 1986년 대우증권 런던사무소 개설, 경남기업 계열 편입, 1988년 ㈜대우 동베를린지사 설치, 프랑스 롱위전자레인지 공장 건립, 대우증권 홍콩사무소 개설 등 세계진출을 본격화했다.

1989년 출간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했고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기도 했다. 출마를 고려할 정도로 대중의 인지도도 높았다. 1998년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까지 성장시켰지만 무리한 확장과 차입경영으로 인해 1999년 해체로 이어진다.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 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토대로 해외 21개 국가에서 세계경영을 펼쳤고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에 달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극심한 유동성 압박에 시달려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끝에 1999년 8월 사실상 그룹이 해체됐고 11월 김 전 회장은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2010년부터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양성사업에 매진,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했다.

대우 일부 계열사는 아직 명맥을 잇고 있다. 지주사 격인 ㈜대우는 포스코에 인수돼 현재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대우자동차는 GM이 인수해 'GM코리아', 대우종합기계는 두산인프라코어, 대우조선공업은 대우조선해양으로 이어졌다. 대우전자는 위니아대우, 대우중공업은 현대로템, 대우증권은 미래에셋대우로 사명이 변경됐다.

대우그룹은 인재창출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례적으로 학자, 관료, 국책은행 관계자들을 적극 영입했고 장관, 국회의원 등 수많은 인재들이 대우를 거쳐갔다. 특히 1980~90년대에는 대학 졸업생들의 최고 인기 희망직장이었다. 해외연수를 비롯해 파격적인 신입사원 프로그램은 선망이었고 수많은 임직원들이 그룹 해체후에도 다른 기업에서 맹활약중이다. 

저작권자 © 굿모닝경제 - 경제인의 나라, 경제인의 아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